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만 제국 (문단 편집) == 외교 == 오스만 제국의 외교방침은 전근대시대 [[중화제국]]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서는 칼리파의 권위를 이용한 종속 혹은 전쟁 양자택일을 강요했으며, 유럽에 대해서는 과거 동로마 제국의 대유럽 외교정책을 담습하여 외국인 [[조계지]]와 교역권한을 부여하는 증서를 부여해 제한적인 교역을 허용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제노바]]를 시작으로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Kapitülasyon(카피튈라시옹),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Ahidnâme(아히트나메)라고 불린 특권증서를 부여했는데, 이것은 해당 국적의 상인이 오스만 제국 영토 내의 한정된 지역에서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고 즘미(zımmi, 비무슬림)상인의 중개[* 이게 꽤 중요한데 19세기 탄지마트 이후 튀르크인을 포함한 무슬림 상인들이 유럽과 직접 교역하는 것이 허용되기 전에는 대유럽무역을 즘미들이 독점하는 형태였다. 주로 지중해, 에게해 권역은 [[그리스인]], 흑해 권역은 [[아르메니아인]]상인들이 중개권을 가지고 있었고 아랍 기독교인과 [[콥트정교회]]교인인 [[이집트인]]상인들도 유명했다. 지금의 [[수에즈 운하]]의 건설에 대해 이미 16세기에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 의해 논의된 바 있으나 기술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해당지역을 장악하던 콥트인 상인연합의 반발로 인해 무마된 일도 있다. 운하가 뚫리면 자기들 중개권에 영향을 미치니까. (당시 중개상들은 알렉산드리아와 홍해에 위치한 항구들 사이의 육상운송을 독점하고 중개료를 받고 있었다.) 그 외에 [[하렘]]에 출입하며 궁전의 여인들과 거래하던 키라(kira)라는 여상인들이 있는데, 이들도 대부분 유대인등의 비무슬림으로 외국산 사치품들을 거래하면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상품을 교역할 수 있는 권한, 협정을 맺은 국가가 오스만 제국에 대사를 파견할 권리, 외국인의 안전보호 보장과 조계지내 군사징집, 지방세, 거주지 수색의 면제, 조계지 내 [[치외법권]]을 포함한다. 이 증서는 상인 개인에게 부여되기도 했으나, 국가를 대상으로도 부여되었으며 특히 쉴레이만 1세 시절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1535년경 프랑스 국민 전체에게 해당 증서를 부여했으며, 이후 대유럽교역 활성화를 목적으로 여기저기에 발급하기도 했다. 이 카피튈라시용을 통한 외교관계는 오스만의 시각에서는 제국을 상대국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술탄들은 이를 제국의 관대함을 보이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유럽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에 상주대사를 파견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상주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오스만이 제국이 외국에 상주대사를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셀림 3세]]시기인 1793년 [[런던]]에 대사관을 개설한 이후의 일이다. 유럽 국가들이 파견하는 상주대사는 포로이자 인질로 취급되었고 오스만 조정의 심기가 불편해지거나 분쟁이 벌어지면 투옥당하는 신세였다. 카피튈라시용에는 대사에 대한 처우도 포함되었지만 18세기까지 유럽의 국제법은 오스만에서 전혀 준수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대사는 스파이 혐의를 받아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갤리선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이런 행태는 술탄의 심기를 거스른 사신의 목이 뎅겅뎅겅 잘리는 중동에서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유럽에서는 야만적이라고 인식되었고 오스만의 대외관계와 이미지를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더 큰 문제는 외교관의 부재로 인해 오스만이 외교전과 정보전에서 계속 뒤처졌다는 것이다. 17세기 말까지만 해도 오스만에는 서유럽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관료가 없어 영국과 네덜란드의 주선으로 조약을 체결해야 했을 지경이었지만 유럽 열강과의 전쟁을 최소화하고 외교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주대사 파견이 필수라는 것을 절감한 18세기부터 전문 외교관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은 개종한 기독교도였다. 18세기 오스만 정부 내 외교관의 비중과 위상은 계속 상승하며 마침내 18세기 말에는 상주대사를 파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상주대사의 파견은 오스만 제국이 비로소 유럽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사건으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18세기 오스만 제국이 상대국보다 우위였기 때문에 상주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넌센스다. 유럽 열강과의 전쟁을 최소화하고 외교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주대사 파견이 필수였으며 오스만은 이를 목표로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하고 외교관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이 유럽국가와 체결한 조약에는 항구적인 평화 운운이 자주 나오는데 불신자와의 항구적인 평화는 모든 국가를 잠정적인 정복대상으로 봤던 16세기 오스만 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오스만 조정이 유럽과의 국력 격차를 인식하고 전쟁을 회피하려 했다는 증거다.[* 모레아 재정복도 오스트리아를 자극해서 이기지 못할 전쟁을 유발할 것이라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18세기 오스만은 유럽 열강들에 외교를 맡기다시피 했고 이들 국가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압박해서 자국에 유리한 평화조약을 주선할 때마다 특혜를 퍼부었다.[* 상주대사의 파견 이전에도 오스만은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스웨덴에 대사를 파견하여 각종 특혜를 약속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압박하게 하는 식으로 국제 역학관계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 카를로비츠 조약부터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중재로 체결된 조약이며 대튀르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전력의 3분의 2를 대프랑스 전선에 배치해야 했다. 7년전쟁 이후에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역할을 맡게 된다.] 오스만의 상주대사들의 또다른 임무는 파견국의 선진문물을 기록하고 본국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오스만의 서구화 개혁은 상주대사들의 보고서를 많이 참조했다. 이미 15세기부터 외국자본은 오스만 경제를 잠식했고 19세기에 접어들면 경제가 외국자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면직물의 50-70%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진짜 원인은 특혜의 남발보다는 유럽의 기하급수적 경제 성장과 자국 산업의 경쟁력 약화에 있다.] 1838년 오스만 제국이 쇠퇴기에 들면서 밀레트 제도와 더불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내정간섭의 주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카피튈라시용을 발급한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 베네치아 공화국 (1454) * 프랑스 왕국 (1535, 1673, 1740) * 잉글랜드 왕국 (1579, 1675) *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1809) * 네덜란드 공화국 (1612, 1634, 1680) * 오스트리아 공국 (1615?) * 러시아 제국 (1711, 1783) * 스웨덴 왕국 (1737) * 사르데냐 왕국 (1740, 1825) * 덴마크 왕국 (1746년 또는 1756년) * 프로이센 왕국 (1761) * 스페인 왕국 (1782) * 미합중국 (1830) * 벨기에 왕국 (1838) * 한자 동맹 (1839) * 포르투갈 왕국 (1843) * 그리스 왕국 (1854년 또는 1855년) * 브라질 제국 (1858) * 바이에른 왕국 (1870)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계기는 [[크림 전쟁]]이후 1856년에 체결된 파리 조약 이후이다. 파리 조약에는 러시아에 대항해 당시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로 구성된 유럽국가협의회에 오스만 제국을 포함시킴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근대식 주권국가 체제에 포함시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조항이 포함되어있다. 또한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을 유럽국가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있기때문에 오스만 제국과 그 계승국인 튀르키예 공화국의 역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전환점이기도하다. 카피튈라시옹은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 이후 [[1914년]]에 무효화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1923년]] [[로잔 조약]]을 체결하면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유럽 열강들에게 짓눌리기 전 지역의 패권을 잡았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청나라]]와는 17세기, 18세기엔 별 다른 마찰 없이 지내다가[* 사실 오스만은 몽골 계통인 [[티무르 제국]]이나 [[무굴 제국]]과는 인종적으로도 가깝고 활동 반경도 겹치지만 청나라는 극동지방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건주여진에 의해 세워진 나라라서 역사적으로 접점이 전혀 없다. 다만 청나라 황제가 몽골의 대칸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잡점을 찾자면 그냥 건너건너 아는 먼 친척(...)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듯.] 위구르 무슬림 [[야쿱 벡]]의 반란이 일어나자 오스만 제국은 위구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야쿱 벡을 에미르로 인정하고 군사 고문까지 파견하여 지원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청나라나 오스만이나 아직까지는 국력이 어느 정도 살아있던 시점이였다. 실제로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는 15만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모아 신장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또한 [[의화단 운동]]이 한창일 때 독일 제국의 권유로 오스만 제국이 의화단을 진압하러 군대를 파병할 수도 있었기에 만약 오스만 제국이 군대를 파병했다면 오스만-청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튀르키예 독립전쟁|영토가 갈가리 찢겨져 유럽 열강에게 저항하느라]] 더 이상 중국 내 무슬림의 독립을 지원하는 일은 없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